종교의식은 실로 상징의 극치다. 상징은 여러 가지 분야에서 두루 쓰이지만
종교에서만큼 진지하고도 강력하게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우상숭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상징은 중요하다.
종교의레는 상징의 정점이다.
이러한 상징을 따른 의례는 머리 이전에, 내면의 원형적 심상을 이용하여
무의식 레벨에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성서학자들의 추정을 따르면)
"이것, 내 몸"이라고 하시며 빵을 주시고
"이것, 내 피"하면서 포도주를 주셨다고 한다.
이 기억이 십자가 수난과 맞물려서 얼마나 사도들 기억에 남았는지
예수님이 거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여러 가지로 형태를 바꾸면서도
계속 거행해 왔다. 특히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은 위대한 말로 간주하여
그 자체로 반쯤 성경으로 여겼고, 그 말을 포함하는 감사기도를
극도로 중요시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 말을 잘못하면 최후의 만찬의
본을 따른 종교적 식사가 되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말보다 이러한 의례,
상징을 이용하여 내면을 설득하는 의례가 가지는 힘이 더 강력하다.
그런 점에서 난 세례도 주수례(이마에 물을 흘리는 세례)보다
침수례(강물 등에 몸을 잠그는 세례)를 더 좋게 여긴다.
오랫동안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중요 종교의례, 즉 성사에 대하여
사효성만을 강조했고, 사람들은 성사의 유효성 여부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전례를 '유효성'만으로 접근하는 사고방식은
전례를 '내면을 설득할 수 있는 살아있는 종교의례'가
아니라, 법적으로 절차를 밟으면 효력을 발휘하는
기계적이고도 종속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심지어 전례를 사랑한다는 사람들마저 저러한 사고방식을 가지니
전례는 종교의례로서의 매력 태반을 잃어버렸다.
주수례는 너무 단순하여 사람들 마음에 설득하는 바가 없다.
유아세례는 더욱 그러하다.
침수례여야 비로소 세례라는 의례의 1차적 의미인 '씻음-정화'
거기에서 파생하고, 사도 바울로가 중요시하였던 2차적 의미인
'죽음과 재생(부활)'이라는 입문례로서의 전통적 구도가 살아난다.
(비단 세례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에서 입문례는 저런 구도를 가진다)
이러한 구도가 살아나는 의례를 거행할 때에야 그 의례는 입문자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살아남아 마음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사라진 절기풍습도 상징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온갖 기억을 되살리고,
감정을 풍요롭게 하는 원형적 심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일이다.
이러한 절기풍습이 사라진 현대사회는 실로 불행하다.
개신교식의 '오직 믿음' 혹은 계몽주의의 '오직 이성'은 부정적으로 돌아간다면
이러한 감성적인 면을 무시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그 폐해가 드러났다.
이성도 인간 내면에 감성적인 측면이 있음을 고려해야
비로소 인간을 고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