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시위대에 대하여 새삼 환멸을 느낀다.

촛불 집회장에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시위 현장 한가운데서 골똘히 생각한 바가 있었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위장에 나왔을까 하는 점이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 하나만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는다. 이 일은 결코 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성적인 문제라 가슴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불만과 이명박 정권의 정책 방향성에 대한 불만,  개인적 감정의 대의적 합리화 등 온갖 문제가 다 뒤섞였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의 발전?

나 또한 그러길 바랐다. 이 일로 사람들이 사회 문제를 좀 더 폭넓게 바라보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을 접기로 했다. 

정운천 농림부 장관. 

비록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와 이명박 정권의 방향 그 자체에 반대하는 의미가 매우 크지만,  쇠고기 수입 문제는 여전히 명분의 핵심에 서 있다.  그리고 정 장관은 농림부 장관으로서 이번 사태의 핵심에 선 인물 중 하나이자 최고위급 책임자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이 시민들이 모인 시위 현장에 직접 나와 자기 의견을 개진하겠다고 하였다. 

아.  시민들이 야유하고 물병을 던지며 격렬히 반응하였기에 10분만에 시위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이게 정상인가?  이게 민주적 시위 현장의 모습인가?  어떤 댓글에 보니까 이러더라. 

"우리는 시위 현장을 토론의 장으로 만들기를 원치 않는다" 

잘 한다.  그래,  시위 현장을 축제판으로 만들기는 괜찮고 토론장으로 만들기는 안 된다고?  도대체 어떤 논리를 따라가야 그런 결론이 성립하냐? 여전히 명분의 핵심에 서 있는 정 장관이 직접 나와 이야기하겠다는데 야유하며 쫓아낸 무리들이 정부와 소통을 원한다고?   눈 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짓이냐?

청문회에 보면 가끔 이런 인사가 있다.  청문회장에서 직접 이야기하며 검증하겠다고 불렀더니,  답변은 보고서로 대신하겠다(혹은 이미 하였다) 하면서  본인은 입을 다문다.   그럼 청문회장의 의미도 없거니와,  보고서로 하는 것과 직접 이야기하며,  문제가 있으면 바로 지적하며 추궁하는 자리는 절대 똑같을 수 없다.

정 장관이 직접 나와서 자기 견해를 밝히겠다고 하였는데 스스로 쫓아내고서는,  "정운찬이는 언론 등으로 자기 견해를 밝힐 기회가 많은 인물"이라서 안 된단다.  웃긴다.    사람들 앞에서 직접 의견을 밝히기와  기자회견으로 의견 발표하기가 똑같다면,  청문회장에서도 답변을 보고서로 대신할 수 있다. 

이게 민주적이라고?  각자 저마다 마음속에 있는 폭력성을 이런 형태로 분출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를 위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비폭력적 민주주의의 발흥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정말로 비폭력적인가?  물건 안 부수고 전경 안 때리기만으로 비폭력적 시위라고 할 생각인가?  최고위급 책임자가 와서 의견을 개진하겠다는데도 거부하는 것들이?

게다가 이런 거대 모임에서 강경파들이 대개 군중심리를 좌우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로 정운천 장관을 야유하며 쫓아내기가 당시 모인 사람들의 '진짜 뜻'이었을까?    군중심리에 우르르 쏠리니까 설령 속으로 '아니올시다' 생각했던 이라도 그 자리에서는 말도 못 했을걸.   그게 군중심리의 무서운 점이기도 하고.


대통령 하야를 함부로 입에 담는 무리들이 정말 싫다. 좋든 싫든 이명박은 대통령이 맞다.  그것도 정말 정당하고도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대통령을 국민들이 석 달만에 하야케 한다면,  이건 이미 여론이 곧 법이 된 상황이다.   나도 이명박식 정책이 싫다. 애당초 이미지로 대통령이 되어서 뚜렷한 철학이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 하야를 운운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만약 정말로 대통령 탄핵 국민 투표를 한다고 해도 이명박이 탄핵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자.  자기들 감정에 휩쌓여  집단적 책임 분배의 면죄부 속에서 '대통령 하야'  '쇠고기 재협상' 등등을 운운하는 정신줄 놔 버린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피드백 속에서 자기네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니까 자기 합리화까지 되어,  이미 어디까지가 자신의 감정적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대의명분을 실현케 하려는 이성적 노력인지 구분도 못하고 있을 거라는 점.

by 비안네 | 2008/06/11 18:10 | 잡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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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푸른화염 at 2008/06/11 18:40
오래간만이 뵙는 듯 합니다. 진실로 공감합니다. 자신들 얘기는 들어달라고 하면서 정부 얘기는 듣지 않겠다는 소리로 밖에 안들리더군요. 전............
Commented by 비안네 at 2008/06/12 11:43
푸른화염/ 와, 링크 타고 오셨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촛불 시위, 처음에는 무척 감동했는데 날이 갈수록 실망하는 터라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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