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13일
악마 탓
Libera nos a malo.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치시니, 사도들과 그 제자들은 그 기도를 암송하되 조금 더 확장하여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마태오 복음서 그리스어판을 엄밀히 따지면 ‘악’이 아니라 ‘악마’라고 해야 한다지만, 전통은 악마라고 하지 않고 악이라 하여, 라틴어 기도문에도 그렇게 낭송한다.
Domine sancte, Pater omnipotens, aeterne Deus
하느님 전능하심과, 하느님이 만물의 근원이심을 강조하니 악이란 무엇인지 따지는데 이 문제가 쉽지 않아. 스콜라 철학자들은 악이란 결핍이라는 말로 설명하였으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이는 천칠백 년간 있었다. 악마가 악의 근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루치페로가 스스로 타락하여 반역 천사들을 이끄는 두목이 되었다면, 이미 악마가 있기 전부터 악이 있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실상 악마라 해도 유혹할 수 있을 뿐, 마음을 조종하지는 못할 터이다. 만약 조종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악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나는 오래 전부터 악마를 운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작부터 불만스러워했는데, 근자에 들어서는 정말 이글루를 통해서라도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화가 많이 났다. 두뇌를 모자걸이로 쓰는지 툭하면 악마 타령을 하는데, 그자들 눈에는 과학은 고사하고 하느님도 보이는가 싶다. 하느님 때문에 악마를 적대하는지, 악마를 적대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상한 사교를 믿어도 악마 탓, 몸이 아파도 악마 탓. 이런 무리들에게 정신질환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악마 탓이다. 자기 눈에 온갖 영이 보여서 기도하며 영적 전쟁을 벌인다는데, 나로서는 그저 종교적 과대망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치들에게 조언을 얻는 사람이 있으니 지켜보는 나로서는 돌아버릴 뿐이다.
일찍이 아타나시오는 악마가 그 모든 힘을 잃었다는 글을 썼지만,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도 아닌 교부 저작은 안중에도 없나 보다. 교부들 글이 안중에도 없다면 의사들 말이야 귓잔등이나 지나가겠는가.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위엄에 찬 하느님, 권위에 찬 하느님, 임금이신 하느님만 찾으니, 스스로를 악마와 맞서는 하느님 군대의 병사쯤으로 여기는데 내 보기에는 그저 호가호위일 뿐이다. 게다가 정신과 약을 먹지 말라고 하는 자들에 이르면, 내 앞에 그자가 있으면 귓싸대기를 때리고 싶을 만큼 울화통이 치민다. 저자들 머리에는 정신과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 아니라 악마를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다. 이 차이는 달라도 매우 다르다.
그뿐만 아니라 악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악마 때문에 기근이 일어나고, 악마 때문에 삿된 유행이 돈다는 글을 보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악과의 싸움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셨다는 믿음을 무효화할 생각이냐고 쏘아주고 싶다. 모든 악을 악마에게 돌리니, 악마는 악의 근원이 된다. 악마가 모든 악의 근원이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구마의식만으로 선교하셨겠지. 왜 그렇게도 생각이 없나 싶다.
# by | 2008/03/13 23:26 | 잡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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