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17일
음력에 대하여.
흔히들 말하기를 음력이 태음태양력이라 과학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묻는다. 도대체 과학적이란 말이 무슨 뜻일까? 역법이 어떠해야 과학적이라고 할까? 불초가 생각건데, 역법은 합리성은 따질 수 있어도 과학성은 따질 수 없다. 음력이 과학적이란 말은 뻔한 미사여구일 뿐 곧이들을 만한 말이 아니다. 이제 차분히 음력을 따져보자.
태양은 하루에 하늘을 360도 돈다. 아침 동녘에서 해가 뜨고 저녁 서녘으로 지며 이튿날 아침에 다시 동녘에서 뜬다. 하지만 별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낮에는 햇빛 때문에 보이지 않으나, 태양과 함께 동녘에서 떠서 서녘으로 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양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별로 표시할 수 있다. 즉 태양이 오늘 갑별과 을별 사이에 있다는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지구도 공전하기 때문에 태양이 어느 별 사이에 있는지 표시해도 조금씩 위치가 변한다. 하루도 1도만큼. 1년 365일 동안 태양이 어느 별과 어느 별 사이로 움직였는지 표시하면 천구상에서 태양이 움직이는 길을 알 수 있다. 그것이 ‘황도’다. 쉽게 이야기했지만, 황도를 설정할 수 있다면 이미 천문학 지식이 탄탄하게 쌓였다는 뜻이다.
지구자전축이 공전궤도면과 90도 각이 아니기 때문에, 천구상 적도와 황도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구상 적도와 황도는 두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 태양이 이 두 지점에 정확히 일치하는 날이 춘분과 추분이다. 물론 태양도 계속 움직이므로 몇월 몇일 몇시 몇분에 일치하는지 계산해야 한다. 정확히 일치하는 때를 ‘절입시각’이라고 부른다. 같은 이치로 천구상 적도와 황도가 가장 벌어지는 지점에 태양이 오는 때를 계산할 수 있다. 각각 동지와 하지다.
현대 천문학은 서양전통을 이었다. 서양 전통에서는 춘분을 중요시한다. (천문학자들이 쓰는 성도가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춘분 무렵 성도를 씀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천구상의 별자리를 표시할 때 위도는 쉽게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경도를 계산할 기준점이 따로 없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춘분점(춘분날 태양이 지나는 황도상 지점)을 기준점으로 삼아 경도를 측정한다. 현재 춘분점은 물고기 자리에 있다. 서양 오컬트계에서 현대가 물고기 자리니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양 점성술에서는 양자리가 첫 번째인데, 이는 점성술이 생길 당시 춘분점이 양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춘분점을 경도상 0도로 정하면, 각각 단위를 나눌 수 있다. 15도, 30도, 45도 등등. 이렇게 15도씩 나누면 24개가 나온다. 태양이 황도상에서 경도좌표가 0도, 15도, 30도 되는 지점에 오면? 24절기는 바로 그런 때를 가리킨다. 24절기도 각각 정확한 절입시각을 계산해야 한다. 24절기는 천구상에서 태양이 움직이는 바를 반영한다.
달이 차고 기욺을 보고 날이 지났음을 안다. 하지만 이슬람력의 경우에서 보듯이, 달이 차고 기욺만으로 날짜를 헤아리면 태양이 움직이는 바를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를 알 수가 없다. 이슬람력에서는 날짜가 같더라도 어느 해에는 여름이고 어느 해에는 겨울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달이 차고 기욺으로 날을 헤아리되, 계절과 완전히 딴판이 되지 않도록 마지노선을 쌓았다. 음력을 계산할 때 24절기를 고려하게 한 것이다.
24절기를 12개씩 두 부류로 나누었다. 각각 중기中氣와 절기節氣라고 부른다. 이중 기준이 되는 날은 중기다.
중기: 동지 대한 우수 춘분 곡우 소만 하지 대서 처서 추분 상강 소설
절기: 소한 입춘 경칩 청명 입하 망종 소서 입추 백로 한로 입동 대설
(24절기는 동지-소한-대한-입춘 순으로 중기와 절기가 차례대로 반복한다.)
동양 전통에서는 동지를 역법의 기준점으로 삼는다. 동지가 든 달을 자월子月로 삼는다. 그래서 증산도에서 쓰는 24절후주에서도 동지가 첫 머리에 나온다. 동지 다음 중기는 대한이다. 대한이 든 달을 축월丑月로 삼는다. 우수가 든 달을 인월寅月로 삼는다. 인월이 음력 1월이다. 그러므로 동지가 든 자월은 언제나 음력 11월이다.
동지(11월) 대한(12월) 우수(1월) 춘분(2월) 곡우(3월) 소만(4월)
하지(5월) 대서(6월) 처서(7월) 추분(8월) 상강(9월) 소설(10월)
음력에서 큰달 작은달 여부는 삭망월朔望月을 따져 정한다. 삭은 그믐으로, 태양-달-지구순으로 일직선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이것도 정확히 일치하는 때를 몇시 몇분까지 계산한다. 망은 보름으로 태양-지구-달순으로 일직선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삭에서 다음 삭까지 날 수를 헤아리는데, 이 시간이 대략 29일 12시간 정도다. 그래서 음력은 큰달이 30일, 작은달이 29일이다.
황도상에서 태양이 움직이는 속도는 일정하지 않다. 겨울철에는 빠르고 여름철에는 느리다. 지구공전궤도가 타원형이기 때문에, 북반구를 기준으로 여름철에는 태양과 멀고 속도가 느리며, 겨울철에는 태양과 가깝고 속도가 빠르다. (여름철이 덥다고 태양과 가깝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태양이 황도상의 어느 중기점에서 다른 중기점으로 가는 시간이 29일 12시간보다 길 때가 있다. 즉, 중기가 없는 달이 생긴다. 이때를 무중월無中月이라고 부른다. 무중월이 음력 윤달이다. 간혹 1년에 무중월이 두 번 들 때가 있다. 중기 2개가 한 달에 드는 경우까지 겹친 것이다. 이렇게 무중월이 두 번 들면 앞 무중월만 윤달로 친다.
공전하는 속도가 (북반구 기준으로) 여름철에 느리기 때문에, 무중월은 여름에 생기기 쉽다. 즉 윤달은 여름철에 잘 든다.
이렇게 윤달을 두어서 음력이 태양의 움직임과 1개월 이상 차이나지 않게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음력은 언제나 1개월 이내만큼 태양의 움직임에 오차가 있다.
그럼 음력의 단점이 무엇인가? 음력은 열두 중기 절입시각을 정확히 계산해야 한다. 또 삭망월 주기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도 달력을 계산했지만 음력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음력을 다 계산하고도 태양의 움직임과 1개월 이내로 오차가 있기 때문에, 음력 날짜만 가지고는 농사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옛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때 24절기를 따졌다. 아니, 따져야만 했다. 그래야 계절을 어림할 수 있으니까. 계절은 태양에 따라 바뀌지 달에 따라 바뀌지는 않는다. 어부들은 어떨까? 어부들은 음력의 월보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음력으로 몇 일인지만 보면 된다.
그레고리오력은 두 가지 단점이 있다. 1월 1일이 전혀 의미 없는 날이라는 점, 각 달의 날 수가 매우 들쭉날쭉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윤년을 계산하는 법도 편하고, 1년의 길이를 태양이 황도를 도는 시간과 매우 근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24절기가 그레고리오력으로는 매년 거의 같은 날짜다. 그레고리오력이 있으면 농부들은 24절기를 따질 필요가 없다. 어부들은 날짜만으로는 보름인지 그믐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부들은 늘 달이 차고 기욺을 따지기 때문에, 그레고리오력을 쓴다고 그리 불편하지 않다. 천문학을 모르는 사람도 밤에 하늘을 보면 그믐인지 보름인지 안다.
이런데도 음력이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학적이란 말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까? 음력을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까? 음력은 계산하기 매우 복잡하다. 복잡한 만큼 유용하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계산하기 복잡하다고 과학적인가? 역법은 과학성을 따질 수 없다. 유용성과 합리성을 따져야 하는데, 음력은 그 점에서 점수가 낮다.
덧붙임- 설과 추석이 그레고리오력으로 어느 정도 사이에 오는지 대충 따졌다.
우수가 그레고리오력 2월 18일-19일 중 온다고 가정하면,
설은 그레고리오력 1월 21일~2월 19일 사이에 온다.
추분이 그레고리오력 9월 23일이라고 가정하면,
추석은 그레고리오력 9월 8일~10월 7일 사이에 온다.
# by | 2007/11/17 00:01 | 잡담 | 트랙백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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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진 휴대전화는 2033-2034년 음력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사실 2033년 문제 때문에 한국천문연구원에서는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일단 윤11월을 두기로 했지만, 문제제기 자체는 거의 십 년 전부터 있었더군요.
'과학적'이라는 말의 정의가 대단히 모호합니다. 천문현상을 많이 반영하여 복잡하다는 게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천문현상을 많이 반영할수록 과학적이라고 정의한다면, 행성의 움직임까지 반영하는 달력이 있다면 그게 더 과학적이 되거든요.
제가 그래서 '역법에서는 과학적을 따질 수 없다. 합리성과 유용성이 기준이 된다'고 하지요.
중국 쪽 사이트 뒤져보면 동지를 11월에 둔다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해서 2033년 윤 11월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거 같던데요. 일단 동지를 11월에 둔 뒤에 12, 1, 2, 3, ..., 10월을 부여하는 데 문제가 없으면 그대로 가고, 만약 그렇게 할 경우 한 달이 남게 될 때에만 무중월을 따져서 윤달을 넣더라고요.
요즘 사우디아라비아 음력에 대한 공부를 약간 했는데, 거기도 복잡하긴 매한가지더라고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복잡한.... 혹시 그 원칙 알고 싶으시다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996년에 한국천문연구원 자료를 이용하여 작성한 만세력에서는 2033년 문제에 대하여 윤 7월을 두었지요. 혼란이 온 것입니다. 그 외에 최초의 무중월을 세는 기준을 '동지가 든 달'로 계산할 것이냐 정월로 계산할 것이냐에 따라서도 문제가 달라지고요. 또, 동지로부터 먼 중기를 한 달씩 끌러올리는 방안도 고려됐습니다.
동지 11월 규칙이 무중치윤 규칙 말고도 한 가지 규칙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중기가 한 달에 두 개가 들었을 때의 규칙 말이지요. 그리고 중기가 한 달에 두 개가 드는 경우는 당연히 겨울에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동지가 걸려서 문제가 더 복잡해진 거지요. 중국에서 동지 11월을 최우선으로 삼은 것은 성문화된 규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나라가 19세기에 동지 11월을 우선으로 적용한 전례를 따라갔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슬람 음력은 평기법을 쓴다고 압니다만... 그래도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단 매달 1일에 시작되는 종교 축일(설날, 라마단 단식 등)은 이 달력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초등달 관측이 가능한 시점의 저녁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라마단 단식은 9월 1일부터 시작하지만 드물게 8월 말일이나 9월 2일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시작하는 날을 정부의 종교 관련 부처에서 따로 발표).
윈도에서 제공하는 이슬람 달력은 평삭법을 따릅니다. 홀수달은 30일까지, 짝수달은 29일까지 넣고, 12월은 30년 중 11번 큰달, 19번은 작은달로 하죠. 연도와 월은 그걸로 확인 가능하지만 날짜는 부정확할 수도 있죠.
한국과학교육학회 맞습니다. 학회의 워크숍으로 실제로 주어진 천문 데이터를 가지고 음력 달력을 만드는 활동을 해볼 것입니다.
그래서 동짓달부터 다음 동짓달까지 13개월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이렇게 해야겠지요.
1.동짓달부터 다음 동짓달까리의 삭과 중기 날짜를 위에 쓰신 대로 순차적으로 배열합니다.
2. 동짓달과 다음 동짓달은 11월이라고 먼저 날짜를 매기지요.
3. 무중월을 윤년으로, 무중월이 두 개 이상이면 첫 번째 무중월을 윤년으로 하되
4. 동짓달을 11월로 맞출 수 없게 되면, 동짓달을 11월로 맞추고자 무중월에도 윤달을 매기지 않는다.
2033년 문제에서도 동짓달부터 다음 동짓달까지 무중월이 있는데도 윤달을 매기지 않았지요.
양력의 경우 그레고리오력으로 개력할 때 그레고리오 교황이 춘분을 3월 21일(니케아 공의회 무렵 춘분 날짜)로 맞추려고 했지요. 그런데 천문학적으로 춘분 날짜를 엄밀하게 따지면서 하루 정도는 차이가 날 수 있음을 알게 됐지요. 부활절을 지정하는 데 있어 3월 31일이란 정해진 날짜를 쓸 것인가, 천문학적으로 매년 춘분 날짜를 계산하여 사용할 것인가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부활절은 천문학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3월 21일을 '교회 달력상의 춘분'으로 정의하게 됩니다.
이런 식이라면 상관없지 않을까요? 사실 매년 특정절기 절입시각을 엄밀하게 따져서 한 해의 시작을 정하고자 한다면, 그건 특정 시간대를 쓰는 나라에서밖에 맞지 않습니다. 지구상에서는 최대 24시간 이내로 차이가 있으니까요. UTC를 기준으로 계산할 수도 있겠지만 희생하는 바에 비해 얻는 게 별로 없지요.
그러므로 1년의 시작점을 동지나, 춘분으로 정하되 하루 정도는 천문학적 날짜와 달라도 상관없다는 식이면 전세계적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