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족주의자였다.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게 몇 가지 있다.
민족주의는 그중 대표적이다.

내가 처음부터 민족주의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강성 민족주의자였다.
대륙삼국설을 믿었고,
한민족의 문화유산은 실로 인류문화의 금자탑이라 생각했다.
시덥잖은 것까지고 '우리네 것이기에' 대단하게 여겼다.

나는 또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다.
한때 천주교에 부담스러워했던 적이 있다. 생각해보라.
대륙삼국설을 믿는 강성 민족주의자가
이천 년 전 중동에 살았던 유태인 남자를 신으로 받드는 종교를
믿는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민족종교 계열을 알아보았다.

천도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천도교는 자료도 부족하거니와
내가 보기에 별 매력이 없었다. 그 다음으로 증산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증산도는 교단 차원에서 발행한 자료가 굉장히 많았다.
천도교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던 반면, 증산도에 대해선 상당히 끌렸다.
혀에 기름칠을 한듯, 증산도에서는 자기네 수행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네 가르침이 얼마나 도리에 맞는지 강력하게 주장했다.
내 마음은 한동안 어느 정도 증산도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자료를 계속 접하다보니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천주교에 부담감을 느끼긴 했어도, 천주교 신자라는 소속의식이
분명하게 있었다. 그런데 증산도는 천주교를 포함하여 온갖 종교의
신이나 교조를 강증산이 보낸 일꾼 정도로 격하하였다.
또한 성경이나 불경의 구절을 증산도쪽 주장에 맞게 인용하는데
그리스도교 논리에도, 불교 논리에도 전혀 맞지 않았다.
증산도의 가르침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상 전혀 과학적이니 않았다.
지축이 바로 선다는 이야기가 과학적인지 국립천문연구원
사이트에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물었는지 모른다. 거기 답변자들은
지축이 선다는 이야기는 과학에서 말하는 바가 아니라고
지겹도록 답했다.

증산도측은 민족주의 감정을 굉장히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실로 위대하다!(환단고기 등 내용을 적극 활용)
우리 민족에게는 상제를 받드는 전통이 있었다.
그 상제가 바로 증산 상제님이시다!(결론)

위 논리를 매우 강조했다.  하지만, 설령 우리 민족이 위대하다고
하여 우리 민족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출신에 따라 신앙을 귀속해야 도리라면
외국인이나 다른 민족 사람들은 증산도를 믿으면 안 된다.
하지만 증산도는 외국 선교를 금지하지 않았다.

 


나는 증산도측에서 작성한,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는 자료를
읽다가, 몇 가지 이유로 민족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우리 민족이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사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내 부모가 위대한 사람이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밖에서는 못난 사람, 비열한 사람일지 몰라도 적어도 자식들에게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같은 식으로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 민족 역사가 위대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까?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얼굴을 가릴 만한 역사이든, 아니면 가슴을 펼 만한 역사이든
그 자체를 사실로서 긍정하고 간직하면 되지 않겠나?
만약 우리 역사가 위대하기 때문에 자랑스러워하고 지켜야 한다면
소수민족들, 혹은 근세에 들어 겨우 독립국이 된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부끄러워해야 하나?

두 번째로는
"도대체 우리 민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자멘호프 박사가 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리지어 다투는 일 없이 으뜸되도록 진실한 마음이,
모두에게 하나 같은 믿는 마음이 다스립니다.
저희는 이제 온 인류의 자식 된 몸으로
당신 제단 곁에 서나이다.


저희는 인류를 하나로 되돌리고자
일하리라 맹세하였나이다, 싸우리라 맹세하였나이다.
권능이시여, 저희가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고
저희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물리치도록 받쳐 주소서.


형제들이여 함께 합시다. 손을 서로 맞잡읍시다.
평화의 군대와 함께 나아갑시다.
그리스도인이든 히브리인이든 무슬림이든
우리 모두 하느님 자식들이니
언제까지나 인류의 선을 위해 기억합시다."
(pregxo sub la verda standardo 중에서 부분발췌, 본인번역)


온 인류의 자식된 몸으로...인류를 하나로 되돌리고자...

나는 이런 말이 좋았다.
모든 인류는 생물학적으로도 공통조상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민족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혼혈할 경우 도대체 민족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언어도 일부러 정책적으로 다르게 만들 수 있다.
보스니아가 그 예겠지.
문화나 역사인식도 그러하다.
결국 민족은 편의상 구분일 뿐, 본질적인 구분이 아니라 해야 옳다.

게다가 오지에 고립되어 산 극소수 소수민족이 아닌 한,
도대체 '단일민족'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민족을 구분하는 데 있어
법적으로 정통성을 따지듯이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도 한민족의 지류요 저것도 한민족의 지류라고 한다.
좋은 것은 다 한민족에게 유래했다고 한다.

한민족...?
귀화한 외국인들은 서럽겠다.
하기사, 전주 이씨 시조가 중국인이라 하여
조선왕조가 화교정권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현생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발원했으니 모두가 아프리카인이라고
한다면 또 모르겠다.

민족이 곧 나라라고 생각도 이상하다.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증산도 자료를 접하면서 민족주의에 회의를 품었다.
나중에 다른 이유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민족주의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이제 와서는, 내가 한때 대륙삼국설을 믿었음이 우습다.

by 비안네 | 2007/11/12 18:15 | 포도주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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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진냥 at 2007/11/12 19:10
민족주의도 여러 면이 있으니까요.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 아라비아의 와하브 운동, 중국 혁명 동맹회의 삼민주의, 이집트 와프트 당의 민족주의 이념이 그 나라의 억압받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힘을 주었슴까? 물론 세계화 시대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고치고 보완해야 할망정 아예 부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봐요.
Commented by BbasyLover at 2007/11/13 09:09
어휴 파시스트 같으니
Commented by 진냥 at 2007/11/13 10:13
BbasyLover/ 식혜양 알고 있소? 검색엔진에서 '빠시스트'라고 검색하면 파시스트가 잔뜩 걸려나온다오(....) 전 빵빠시님 블로그에 들어가고 싶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Commented by BbasyLover at 2007/11/13 11:35
그런거 모른다능 그렇지 않다능 님 이상하다능 우리 애인님은 그런 거 아니라능
Commented by 비안네 at 2007/11/13 18:52
진냥/ 단재의 역사학은 이제 유통기간이 지났다고 생각해. 단재 선생은 독립운동가면서 역사학자였지만, 무게중심이 독립운동 쪽에 있다고 봐. 특수한 상황에서만 의의가 있기에, 현대에서는 그 의의가 사라진다는 주장이지. 내가 본디 강성 민족주의자였던 만큼, 내가 민족주의를 배반(?)하니 그 또한 강성이 되는 것 같아. 게다가 난 아나키스트임을 자인하잖아? 국가주의도 나쁘다고 여기는데, 하물며 민족주의라면 어떠하겠어? 난 小國寡民이 정말로 옳다고 여겨. 그러고 보니, 노자에 대해서는 '고대중국 최초의 아나키스트'란 말이 있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역사상 성공한 유일한 아나키스트'란 말이 있어. 처음에는 나도 두 말에 모두 공감했어.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아나키스트라 함은 억지라고 생각해. 예수님의 관심사항은 '하느님 나라가 구현되는 것'이었거든.

Bbasylover/ 파시스트라니, 나 보고 한 소리니? 생각해보아라. 난 파시즘 하고는 일만 광년쯤 떨어졌단다. 이런 빠시스트 같으니. (한숨)
Commented by 진냥 at 2007/11/16 21:28
소국과민이야말로 유통기간 지난지 꽤 되었지 않소(...)
Commented by 비안네 at 2007/11/16 22:13
진냥/ 소국과민은 이미 도덕경 당시에도 군주가 바라던 바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외면받은 말이었지... 유통기한이 지난 게 아니라, [유통된 적이 없다]고 보아야 해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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