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12일
나는 민족주의자였다.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게 몇 가지 있다.
민족주의는 그중 대표적이다.
내가 처음부터 민족주의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강성 민족주의자였다.
대륙삼국설을 믿었고,
한민족의 문화유산은 실로 인류문화의 금자탑이라 생각했다.
시덥잖은 것까지고 '우리네 것이기에' 대단하게 여겼다.
나는 또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다.
한때 천주교에 부담스러워했던 적이 있다. 생각해보라.
대륙삼국설을 믿는 강성 민족주의자가
이천 년 전 중동에 살았던 유태인 남자를 신으로 받드는 종교를
믿는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민족종교 계열을 알아보았다.
천도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천도교는 자료도 부족하거니와
내가 보기에 별 매력이 없었다. 그 다음으로 증산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증산도는 교단 차원에서 발행한 자료가 굉장히 많았다.
천도교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던 반면, 증산도에 대해선 상당히 끌렸다.
혀에 기름칠을 한듯, 증산도에서는 자기네 수행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네 가르침이 얼마나 도리에 맞는지 강력하게 주장했다.
내 마음은 한동안 어느 정도 증산도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자료를 계속 접하다보니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천주교에 부담감을 느끼긴 했어도, 천주교 신자라는 소속의식이
분명하게 있었다. 그런데 증산도는 천주교를 포함하여 온갖 종교의
신이나 교조를 강증산이 보낸 일꾼 정도로 격하하였다.
또한 성경이나 불경의 구절을 증산도쪽 주장에 맞게 인용하는데
그리스도교 논리에도, 불교 논리에도 전혀 맞지 않았다.
증산도의 가르침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상 전혀 과학적이니 않았다.
지축이 바로 선다는 이야기가 과학적인지 국립천문연구원
사이트에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물었는지 모른다. 거기 답변자들은
지축이 선다는 이야기는 과학에서 말하는 바가 아니라고
지겹도록 답했다.
증산도측은 민족주의 감정을 굉장히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실로 위대하다!(환단고기 등 내용을 적극 활용)
우리 민족에게는 상제를 받드는 전통이 있었다.
그 상제가 바로 증산 상제님이시다!(결론)
위 논리를 매우 강조했다. 하지만, 설령 우리 민족이 위대하다고
하여 우리 민족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출신에 따라 신앙을 귀속해야 도리라면
외국인이나 다른 민족 사람들은 증산도를 믿으면 안 된다.
하지만 증산도는 외국 선교를 금지하지 않았다.
나는 증산도측에서 작성한,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는 자료를
읽다가, 몇 가지 이유로 민족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우리 민족이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사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내 부모가 위대한 사람이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밖에서는 못난 사람, 비열한 사람일지 몰라도 적어도 자식들에게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같은 식으로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 민족 역사가 위대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까?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얼굴을 가릴 만한 역사이든, 아니면 가슴을 펼 만한 역사이든
그 자체를 사실로서 긍정하고 간직하면 되지 않겠나?
만약 우리 역사가 위대하기 때문에 자랑스러워하고 지켜야 한다면
소수민족들, 혹은 근세에 들어 겨우 독립국이 된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부끄러워해야 하나?
두 번째로는
"도대체 우리 민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자멘호프 박사가 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리지어 다투는 일 없이 으뜸되도록 진실한 마음이,
모두에게 하나 같은 믿는 마음이 다스립니다.
저희는 이제 온 인류의 자식 된 몸으로
당신 제단 곁에 서나이다.
저희는 인류를 하나로 되돌리고자
일하리라 맹세하였나이다, 싸우리라 맹세하였나이다.
권능이시여, 저희가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고
저희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물리치도록 받쳐 주소서.
형제들이여 함께 합시다. 손을 서로 맞잡읍시다.
평화의 군대와 함께 나아갑시다.
그리스도인이든 히브리인이든 무슬림이든
우리 모두 하느님 자식들이니
언제까지나 인류의 선을 위해 기억합시다."
(pregxo sub la verda standardo 중에서 부분발췌, 본인번역)
온 인류의 자식된 몸으로...인류를 하나로 되돌리고자...
나는 이런 말이 좋았다.
모든 인류는 생물학적으로도 공통조상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민족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혼혈할 경우 도대체 민족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언어도 일부러 정책적으로 다르게 만들 수 있다.
보스니아가 그 예겠지.
문화나 역사인식도 그러하다.
결국 민족은 편의상 구분일 뿐, 본질적인 구분이 아니라 해야 옳다.
게다가 오지에 고립되어 산 극소수 소수민족이 아닌 한,
도대체 '단일민족'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민족을 구분하는 데 있어
법적으로 정통성을 따지듯이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도 한민족의 지류요 저것도 한민족의 지류라고 한다.
좋은 것은 다 한민족에게 유래했다고 한다.
한민족...?
귀화한 외국인들은 서럽겠다.
하기사, 전주 이씨 시조가 중국인이라 하여
조선왕조가 화교정권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현생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발원했으니 모두가 아프리카인이라고
한다면 또 모르겠다.
민족이 곧 나라라고 생각도 이상하다.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증산도 자료를 접하면서 민족주의에 회의를 품었다.
나중에 다른 이유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민족주의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이제 와서는, 내가 한때 대륙삼국설을 믿었음이 우습다.
# by | 2007/11/12 18:15 | 포도주 | 트랙백 | 덧글(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Bbasylover/ 파시스트라니, 나 보고 한 소리니? 생각해보아라. 난 파시즘 하고는 일만 광년쯤 떨어졌단다. 이런 빠시스트 같으니. (한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