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시즘에 대하여.

영화 엑소시스트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엑소시즘', '엑소시스트' 같은 전문용어(?)가 알려졌다.
엑소시즘은 라틴어 엑소르치스무스Exorcismus를 영어식으로 읽은 발음이다.
엑소Exo라는 접두사가 '안에서 밖으로'라는 뜻이다.
'엑소르치스무스'란 결국 사람 안에 있는 악령을 밖으로 몰아낸다는 말이다.

결국 엑소르치스무스 또한 '기도'이다.
다만 기도하며 청하는 바가 '악령 몰아내기'일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다.

천주교 종교의례는 공동체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으로 나뉜다.
공동체적인 것은 전례(典禮), 리뚜르지아Liturgia라 부른다.
전례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의례이다.
그러므로 장엄하고, 지켜야할 바도 많으며,
종종 성직자(주교,신부,부제)만 거행할 수 있도록 자격을 제한하가도 한다.
공동체적인 기도이기에 대개 공동으로 모여 의례를 거행하고
설령 혼자 거행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이름으로 거행함을 주지한다.

그에 반해 사적인 기도는 그러한 제한이 없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며, 어떻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까다롭게 정하지도 않는다. 큰 틀만 유지하면 된다.
당연히 반드시 성직자가 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

'악령을 몰아내는 기도'를 할 때,
사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전례로 기도하는 것은 차이가 큰다.
사적으로 기도할 때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할 수 있지만,
전례로 기도할 때는 <교회의 이름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거행한다.
전례로 하는 '악령을 몰아내는 기도'를 라틴어로 마뉴스 엑소르치스무스Magnus exorcismus라고 부른다.
이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장엄구마식(莊嚴驅魔式)이라고 부른다.

장엄구마식을 거행할 때는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교구장이 허락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교황청이 허락하는 줄 아는데, 사실이 아니다)
교구장 주교는 신중하게 판단한 뒤, 믿을 만한 사제를 골라 허락해 준다.


1999년에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로마 전례서 중 구마예식편을 수정하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를 인중하였다.
(경신성사성-천주교의 종교의례 분야를 다루는 기관)
마르틴 루터가 천주교에 반기를 든 이래, 천주교는 더욱 중앙집권화하였고
종교의례도 통일하여 확정한다. (그 이전까지는 지역에 따라 종교의례가 달랐다)
이때가 1570년이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이후, 공의회 논의사항에 따라
전례를 개혁한다. 전례가 본디 의미를 잃고 일그러진 부분을 수정하고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고 유연하게 바꾼다.
1970년 이후, 천주교 전례는 그 이전과 비교해서 확연히 바뀌었다.

비록 구마예식편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미사 기도문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참고하여 생각하건데,
쓸데없는 수식어를 없애고 전체적으로 간단명료하게 하였으리라 짐작한다.

전례의식을 바꾸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례의식은 결코 불변하지 않는다.
핵심이 되는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시대에 따라 바꿀 수도 있다.
전례가 사적인 기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점이다.

엑소시즘, 즉 구마기도에 관심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오컬트 관련 사이트에서도 이러한 예가 많고, 천주교 신자 중에도 제법 있다.
천주교인이 아니면서 장엄구마식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전례문은 주문이 아니다. 그 자체로 힘을 가진 언령이 아니다.
설령 천주교 신자라 하더라도, 장엄구마식 기도문을 읊는다 하여 전례가 되지는 않는다.
'기도를 올리는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개인'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대표할 만한 공적인 자격을 가진 사람은 성직자이다.
(전례 중에서도 모든 신자가 거행할 수 있는 의례가 더러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성직자에게 유보한다)


귀신을 쫓는다며 '주의 기도'와 함께 '사도신경'을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더더욱 황당한 일이다.
사도신경은 사실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가 아니다.
사도신경이란 로마 교구 교회에서,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쓰던 <신앙고백문>이기 때문이다.
신앙고백문, 즉 '우리는 서로 같은 신앙을 믿음을' 확인하는 고백문이다.
서로가 같은 신앙을 믿는다, 같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표이다.
신분증이라고 해도 좋다.
결국 사도신경은 하느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하는 것이다.
교회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증표와 같다.

그런데, 신앙을 믿지 않는 사람이, 믿을 생각도 없는 사람이 신앙고백문을 낭송해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치 우리나라 국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애국가를 노래해 보아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도 더 있다.
툭하면 악마니 귀신이니 하면서 문제를 그쪽으로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심지어 우울증 환자 중 90%는 귀신 등과 관련이 있다고 쓴 글도 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만약 정말로 그러하다면 정신의학이 발달할 여지 따위 없었다.


나는 귀신에 씌는 일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천의 하나, 만의 하나라 하더라도 많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정신적인 문제인데도 얼마든지 '귀신에 들린 듯이' 보일 수 있다.
이중인격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암시 등으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정신과적 문제를 가진 사람 중에,
실상 정신과가 아니라 종교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 각지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들을 상대하고, 또 대부분 낫운다.
현실이 이러하다.

 

by 비안네 | 2007/06/27 23:14 | 잡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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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oir at 2007/07/05 09:36
exorcism은 중세 후기에 악령 몰아내기만이 아니라 불러오기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 necromancy와 동의어에 가깝게 쓰이기도 했습니다.
Commented by 비안네 at 2007/07/27 19:35
Noir/ 말을 듣고 정말 놀랐어요. 엑소르치스무스가 네크로맨시 의례에서 그런 역할을 담당할 줄 누가 알았겠나요? 그러니 엑소르치스무스를 더더욱 숨길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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