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저글링 러쉬야!

일찍이 조선에 위대한 선비가 있었다. 성은 정 씨요, 존함은 '철조'이니, 호를 석치石癡라 하셨다. "미쳐야(狂) 미친다(及)"를 신조로 삼아 정녕 도인의 길을 걸으셨다. 이분은 벼루 만들기에 미쳐서 항상 정과 망치를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다니다가 돌을 보면 정과 망치를 꺼내 벼루로 다듬는데, 돌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석치가 만든 벼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당대 글 쓴다는 사대부치고 석치가 만든 벼루를 하나쯤 가지지 않으면 행세하지 못했다니 말 다했지 않은가. 이분은 정녕 우리 선조라.

일본 사람 히무라 키세 씨가 아챠코 동인지 셋을 만들어 코미케에 내놓았다. 어디까지나 동인지라 조선 땅에 정식 발매될 리도 없고 하여 스캔 번역본으로나 인터넷상에 떠돌았을 뿐이다. 이런 와중에 귀찮은 짓을 사서 하는 사람 몇이 뜻을 모아 원작자 허락을 얻어, 출판 번역본으로 팔기로 했다. 불감청이로되 고소원인 바, 이런 일을 자청해서 하기로 하다니 숱한 동지들이 동요했다.

미욱한 이 몸 또한 아챠코 동인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일찍이 공중니가 말하기를 "조문도 석가사의"라 하였다. 비록 그만한 열정은 없다 하더라도 정 석치의 후배라 자처하는 자로서 이런 정도 견마지로는 마땅한 도리이다. 성당에서 세 달 전부터 피정 간다고 하여 청년 연합회 이름으로 사람을 모아 5월 5일 16시에 모여, 장충동 피정의 집(베네딕토 수도회 서울 분원)에 가기로 했다. 이 몸 또한 부득이 가야 했다. 그러니 기필코 토요일 오전 중에 손에 넣어야만 했다. 전날 밤, 이 천한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2007년 5월 5일, 이 버러지와 같은 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여 예정보다 늦게 일어났다. 일어나 주섬주섬 준비하니 모친께서 일어나 바나나 쉐이크를 주셨다. 이를 조식으로 삼았다. 코믹 행사장인 양재역 AT 센터에 가니, 도착한 때는 09시 30분이었다. AT 센터 앞 공터가 본시 썩 넓은 편은 아니지만, 인민들이 너무 많아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코믹 통제 동무들이 줄로 구획을 정리해 두었다. 입장권을 끊고 행사장 안에 들어가니 떄가 11시 무렵이었다. 들어가자 마자 아차코 동인지를 파는 부스로 달라갔는데 이 무슨 일인가? 부스가 본디 있어야 할 위치에서 뚝 떨어져 벽에 붙었고, 그 앞에 인민들이 세네 명씩 열을 지어 줄을 섰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광경을 보고 나서야 미욱한 이 몸은 한탄하며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너무 물렀다' 모르긴 몰라도 줄 길이가 20m는 족히 되었으리라.

줄 끝으로 가 1시간 동안 기다려 반쯤 갔더니, 언제부터인가 줄이 움직이는 속도나 늦어지더라. 앞에서 한 처자가 나와 "다 팔렸습니다, 내일 오세요!" 하고 외치니 가엾은 인민들이 웅성대며 동요했다. 이에 동무들이 부스로 몰려가 따지니 부스측에서 말하기를 "오늘 분량이 이미 다 팔렸어요. 지금 끊어야 해요, 6월에도 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인터넷 공지에 <재고가 남는다면 6월 코믹에 나옵니다> 라고 했음을 기억하는데, 6월에도 한다는 말을 쉬 믿을쏘냐. 미욱한 몸은 그때부터 일이 헝클어졌음을 직감했다.

노하여 행사장을 나오면서 고민했다. 피정을 가야 하는가? 6월에도 나온다는 말은 믿어야 하는가? 오랜 번민과 고뇌 속에 자반 뒤지기를 하던 끝에 피정에 가지 않기로 작심하였다. 마침 그날 저녁에 대학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기에, 그 친구 또한 코믹이란 데에 한번 가 보고 싶어하여 같이 가기로 하였다.

미욱한 몸은 그날 밤 아예 잠자지를 않았다. 5시 50분에 일어나 강남역에서 친구와 만나, 7시 조금 전에 AT 센터에 도착하였다. 그때 당도하니 인민들이 불과 스물 정도뿐이 안 되더라. 일요일은 토요일과 달라 1시간 먼저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행사장에 들어가도 부스 판매 공간으로는 아니 들여보내 주니,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견마와 같은 몸 앞으로도 수십 인민들이 있으니, 심히 불안했다. 때가 되어 진행 동무들이 판매 공간으로 들여보내 주니, 동무들이 앞다투어 달리거늘 그 달리는 자세는 개와 같으며, 몰리는 모습은 저글링과 같았다. 진행 동무들이 뒤에서 "뛰지 마세요" 하고 외치거늘 어느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

해당 부스측이 어제 뜨거운 경험을 교훈 삼아 번호표를 배부하니, 이 몸은 쉰여덟 번째였다. 그토록 서두르도고 미욱한 몸 앞으로 쉰 일곱 명이나 더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번호표는 백예순일곱 번까지만 배부하고, 그중 부록 포스터는 쉰다섯(나중에 쉰넷으로 정정) 번째에게만 주기로 하여 몹시 배가 아팠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차코 동인지 세 권을 일요일에야 손에 넣었으니 실로 견마와 같은 공이요, 안 해도 될 일까지 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의 소치라. 석치의 후예라 자처하는 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by 비안네 | 2007/05/10 08:24 | 잡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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