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실 사진전에 다녀오다

몇 주일 전인가, 같은 학교 다른 과지만, 어쩌다 보니 죽이 잘 맞아
정말 친하게 된 여자 친구가 있다. 얘와 함께 서울에 있는
구한말 역사의 현장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경복궁-운현궁-운현궁 뒤편 석조 건물- 아관 (아관파천의 그 아관)
아관, 즉 구 러시아 대사관은 덕수궁 대한문 옆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
어떻게 생겼을까 두근거리며 갔더니 탑 한쪽만 서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 전쟁 때 폭경으로 날아고 탑 한쪽만 남았다고,
표지판에 적혀 있었다. 남은 건물 터를 살펴 보니,
건물이 온전히 남았다 하더라도 그리 크지는 않을 듯했다. 
'여기가 고종 황제가 일 년간이나 피신했던 장소인가' 하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조금 내려오니 대한제국 황실 사진전을 열고 있었다.
무료라 들어가 보았다.
이름은 대한제국 황실 사진전이라 했지만,
정확히는 고종 황제 붕어 직후 장례식 모습과 그 몇 년 전
고종 황제와 순종 (당시 황태자)를 비롯하여 영친왕과 의친왕 등
황실 관련 인물 단체 사진이 주를 이루었다.
영친왕이 일본에서 8년간 있다가 잠시 귀국하여 사당에 들러 인사하는
사진, 의친왕의 아들이 노래하는 사진, 영친왕이 도자기에 휘호하는 사진..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은 고종 황제의 장레식 사진이었다.
망국의 군주,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보고자 발버둥쳤지만
끝내 막지 못했던 서글픈 왕. 내 조상들이 오백 년간이나 군주로
섬겼던 집안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죽음은 서글펐다. 대한제국의 군주가 붕어했는데도, 그 장례식을 왜
일본식으로 치러야 하고, 왜 일본 신직神職이 참가하며, 왜 빈소를
일본식으로 꾸며야 했는가.  기록 사진에 남은 인산식 장면이 서글펐다.
사진 속, 대한제국 백성들은 대한문 앞에 모여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순종 황제가 즉위하고, 얼마 안 있어 대한제국군은 정식으로 해체된다.
세상에 어느 군주가 자기 군대를 자기 손으로 해산케 하겠는가.
하지만 순종 황제를 그렇게 해야 했다.
대한제국군이 현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 영문도 모르고 모이자,
일본군은 군대를 해산한다는 순종 황제 칙서를 낭독하고
강제로 무장을 해제캐 한다. 퇴직금 삼아 돈 몇 푼씩을 나누어 주었다는데,
당시 군인들은 그 돈을 받자 울면서 길에 던지고 갔다고 한다.
황실 수비대 대대장들 중 한 명이었던 운파 박승황 참령은
이 소식을 미리 전해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몇 년 뒤, 순종 황제마저 비운에 붕어한다.
순종 황제가 유서 삼아 남겼다는 글은 정말로 참담했다.
망국의 군주로서, 스스로 이천만 생령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에' 대한제국이
무너지지 않고 지금껏 이어져 내려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 치하, 광복, 건국, 분단, 한국전쟁, 나라의 기강을 잡지 못해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친일파가 득세하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이렇게 여기까지 왔다. 도대체 나라란 무엇일까.
영친왕의 작은 아들이자, 사실상 외아들이었던 이구 공이 지난 해에
숨을 거두었다.  그 어머니였던 이방자 여사도 참 기구하다.

오백 년간 이 땅을 다스렸던 왕가를 위하여,
내 조상들의 군주였던 분을 위하여,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by 비안네 | 2006/11/17 21:35 | 감상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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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oir at 2006/11/23 16:55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떤 형식으로 존속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황가가 사라지지 않고 만주국처럼 보호령, 실질적 식민지가 되어 대일본제국이 '두 황제'가 아니라 '세 황제'를 위해 싸웠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요.

설령 그렇다고 했어도 분단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연합군 측에서 대한제국 황실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고요. 실제로 소련군은 식민지 조선을 공격한 뒤에 진주했고, 미군 역시 조선에 상륙하며 조선을 적국의 일부로 간주했으니. 황실이 잔존해서 명목상 독립을 유지하며 만주국 황실처럼 일본에 협력했다면 주축국 일부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지리적인 이유로라도 분할점령은 피할 수 없지 않았을까요.

뭐, 황실이 살아남아 만주국처럼 되었다고 하더라도 2차대전을 넘기는 건 불가능했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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