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6월 27일
한국에 졌다고?
굿판을 멈추어라!
장담하거니와 이 글을 읽고 욕을 퍼부을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유대교 금언에 이르기를 지혜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침묵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변이 악머구리 끓듯 너무 시끄러워서 나도 소리쳐야겠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대(對) 스위스 경기에서 졌다.
한국 대표팀은 16강에 진출하지 못했고 국민들은 경기 내용을 두고 욕설이 많다.
FIFA는 아주 더러운 조직이라는 둥, 월드컵 따위 개판이라는 둥 험악하다.
(나처럼 그런 욕설에 동조하지 않는 이는 모두 매국노에 인간 말종이란다)
단순히 욕설로만 끝내지 않았다.
FIFA에 5백만 명이 항의하면 재경기가 열린다는 헛소문이 퍼져,
핸드폰에 무작위로 'FIFA 홈페이지에 항의합시다' 하는 문자가 온다니 말 다했다.
오죽하면 FIFA측이 자기네 홈페이지에 한국측 사용자를 막았겠는가.
대다수가 이번 대(對) 스위스 경기에서 심판이 지나치게 오심했다고 거듭 강조한다.
만약 오심이 없었다면, 한국 대표팀이 경기에서 이겼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2002년 월드컵 대(對) 이탈리아 경기 때 우리나라 언론이나 국민들 중에
심판 오심을 지적한 이는 몹시 드물었다.
어떤 사람은 2002년 대(對) 이탈리아 경기 때와 이번 대(對) 스위스 때는
오심을 한 정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정말일까?
차 감독은 26일자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에
<벌써 우리의 억울함을 탓하는 듯 현지에서는 "2002년 한국에 진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비교한다면 한국의 억울함은 아무것도 아니다"며
정중히 질타한다>고 썼다.
해외 언론이 보기에 대(對) 이탈리아 경기 때나 이번 대(對) 스위스
경기 때나 오심한 정도는 별 차이가 없다는 소리이다.
설령 오심한 정도가 이번 대(對) 스위스 경기 때가 더 심했다고 쳐 보자.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십보백보'란 말이 나온 고사를 생각해 보자.
맹자가 말하기를 싸움에서, 오십 보를 달아난 자가 백 보를 달아난 자를
비웃더라도, 달아나기는 매일반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했다.
오심하기는 똑같다. 역사학에서는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고 말한다.
관련된 요소가 하도 많아, 어떻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으리라
예상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지나간 역사를 바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오심이나 저 오심이나 오심하기는 똑같다. 오심이 없었더라면
실제 경기에 영향이 어떻게 왔을지를 계산할 수 없다.
(나비 효과를 생각해 보자)
요인이 크다고 결과도 크다고 장담할 수 없고,
요인이 작다고 결과도 작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그리니 결국 '오십보백보'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들 이렇게 시끄러운가?
소설 동의보감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으니 양해 바람)
허준이 유의태 문하에서 파문당한 뒤, 내의원 취재에 응하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충청도 지방 어느 마을을 지나다
그만 온 마을 병자를 보게 되었다. 허준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병자르 돌보던 차에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린 사람이 찾아왔다.
마을 촌장이 "더 중한 사람도 옆에서 기다리는데 자네 정도 사람이
어찌 찾아오는가?" 하고 꾸중하자 허준이 말했다.
"내두십시오. 사람은 남의 중병보다는 자기 고뿔이 더 아픈 법이니까요"
우리도 '남의 중병보다는 자기 고뿔이 더 아픈 사람'이 아닐까?
월드컵 열기는 분명히 과열되었다.
삼일절에도 현충일에도, 방송사들이 종일 월드컵 관련 방송을 내보낸 것만으로도
그 증거는 충분하다. 도대체 방송만 보면 국경일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우리는 축구를 즐겼나? 마침 재미난 예가 있다.
한국 야구 대표팀이 WBC 경기에 나갔을 때, 나처럼 야구에 통 관심이 없는 이는
나간 줄도 몰랐다. 그런데 한국 야구 대표팀이 WBC 경기에서 선전하자
느닷없이 없던 중계 방송이 생기고,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우리는 야구를 즐겼는가?
우리는 축구를 즐기지 않았고 야구를 즐기지 않았다.
안톤 오노라고 하면 떠오르는 쇼트트랙 금메달 탈취(?) 사건 때도
우리는 쇼트트랙을 즐기지 않았다.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우리는 '국가'를 즐겼다.
'국가'라고 두 글자로만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말로 국가를 즐겼다면 삼일절에, 현충일에 방송사가 월드컵 방송만 내보냈을 리 없다.
방송사만 탓하지 말자.
방송사는 분명 '국민들은 국경일 방송보다 월드컵 방송을
더 좋아하겠지' 하는 계산이 있었을 터이다.
방송사가 시청률에 목매는 줄은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즐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반도에 스스로를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4천만 명짜리 공동체가 있다.
하지만 공동체원들은 대한민국 공동체를 대표하는 정부 조직에 실망했다.
정부는 대한민국 공동체원들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정부만 부응하지 못하지 않았다. 공동체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신 관광이니, 어글리 코리언이니 하는 말을 다들 들어 보았다.
해외 한인들이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더란 이야기도 들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등쳐먹더란 이야기도 들었다.
예전에 어느 통계인가, 우리나라 국민들이 국가에 자부심을 갖는 정도가
낮더란 기사를 읽었다. (어느 신문 몇일자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내 주변에서도 사정만 된다면 다른 나라로 이민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퍽 있다.
하지만 누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못나고 보잘것없노라 생각하고 싶어할까?
자기가 기르는 개도 다른 사람 개보다 낫기를 바란다.
하물며 조국임에야?
누구든 자기 조국이 강하고 멋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국제 경기가 있으면 한국 대표팀에 감정 이입하여 열중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저는 KOREA를 등 뒤에 새겼으면, 한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럼, 한국 대표팀이 외국 대표팀이랑 경기해서 지면, 한국이 진 것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여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생각한다.
일본을 보자. 일본은 이번 월드컵에서 죽 쑤었다.
하지만 누가 일본을 무시하는가?
일본인들 보고 쪽발이니 원숭이니 하고 싸잡아 욕하지 말자.
외국에선 일본을 더 잘 알고,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보다 발언권이 더 세다.
미국을 보자.
미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성적이 어떠한지 모르지만,
누가 미국을 무시하는가?
실제 국력 차 앞에서 국제 경기를 통해 감정 이입한 것 따위 의미가 없다.
부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 반미 감정이 높아졌지만,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가?
월드컵에 의미를 아무리 크게 부여한다 해도 결국 축구일 뿐이다.
축구 선수나 감독은 축구에 인생을 걸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스포츠를 업으로 삼아 먹고 사는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스포츠는 어디까지나 스포츠일 뿐이다.
우리 편이 이기면 즐겁고, 지면 아쉬운 정도로 끝내야 옳다.
이제 진정들 좀 하자.
대(對) 스위스 경기에 졌지만, 한국이 스위스에 지지는 않았다.
(월드컵이 국가의 사활을 건 전쟁도 아니고 말이다.)
한국측 선수팀이 스위스측 선수팀이랑 경기해서 졌다고 해서
스위스란 국가를 미워할 필요 또한 없다.
대한민국과 스위스간 우호를 증진하면서
국익에 도움이 될 방편을 찾는 것이 이 나라 장래를 위해 좋다.
스위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마찬가지이다.
월드컵을 두고, 마치 국가간 대결처럼 생각하지 말자.
정말 보고 있으면 미치겠다.
# by | 2006/06/27 05:13 | 잡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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