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히 SS] 거울 조각-2

 

어느 날 쿈이 날 공원으로 불렀다. 해가 서녘에 걸려 온통 붉은 황금처럼 빛나던 때였다.


쿈이 날 보더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사귀자고 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쿈도 더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기뻤다. 눈물이 날듯이 기뻤다. 나도 처음으로, 다른 여자애들처럼 남자한테 고백받았다. 그것도 내가 남몰래 좋아하던 사람한테 받았다. 그리고 슬펐다. 눈물이 날듯이 슬펐다. 내 마음에 걸린 어둠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도 잘 알았다. 그 상태로 쿈이랑 사귀어 보았자 다른 여자애들하곤 달리 남자를 즐겁고 기쁘게 해 주지 못한다. 그저 일방적으로 내 어둠을 쿈 어깨 위에 지울 뿐이었다.


그러다 쿈이 날 떠나기라도 하면 난 더욱 상처받을 터였다. 내가 먼저 쿈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내 힘으로 어둠을 깨끗이 몰아낸 뒤 밝게 웃으며 쿈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쿈이 먼저 고백해 버렸다. 나는 웃으며 쿈에게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려고 했다. 웃으려고 했는데 얼굴 근육이 뻣뻣해서 제대로 웃지 못했다.


그날 밤, 나가토를 찾아가 펑펑 울었다. 나가토는 그런 나를 말 없이 바라보며 다독여 주었다.


사정이 점점 나빠졌다.


아사쿠라 료코는 나랑 친구였다가 싸운 뒤 사이가 소원해졌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도 안 본듯이 하고는 했다. 쿈이 나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뒤, 갑작스레 료코가 날 드러내놓고 적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괴로웠던 것은 장난이라고 할 만큼 지독하게 괴롭혔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어두면 없어졌다. 책가방이 없어져 찾아보면 쓰레기통에 있었다. 책상 위에 온통 칼자국이 나 있었다.


료코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차마 따질 수 없었다.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채 료코를 다그쳐 보려고도 했지만 어물거리다 말았다. 심증만 있을 뿐 현장을 잡은 적은 없었다. 료코는 쿈에게도 고양이처럼 꼬리를 세웠다. 쿈은 료코를 무시했다. 나가토가 쿈을 편들자, 료코는 나가토하고 크게 싸웠다. 나가토가 싸움에서 이겼지만, 료코는 여전히 꼬리를 세우고 다녔다. 내 별명은 유령에서 마녀로 바뀌었다. 칙칙하게 구석에 앉아 오컬트 책이나 읽는 외톨이에겐 마녀가 딱이라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억지로 가슴을 펴고 힘내려고 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악몽이 찾아왔다.

신발 서랍장에 편지가 한 장 있었다.료코 이름으로 돼 있었는데, 나보고 방과 후에 학교 옥상으로 오라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방과 후에 약속대로 옥상에 찾아갔다.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억지로 휘어 잡았다.  료코랑 가까이 지내는 남자들이었다. 남자 네 명, 료코 하나, 그렇게 다섯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애들이 날 억지로 무릎 꿇렸다.


"마녀에겐 역시 벌레며 두꺼비겠지?"

료코가 활짝 웃으며 가방을 뒤적이더니 병을 꺼냈다. 지네며 두꺼비, 조그만 개구리가 들어 있었다. 남자들이 내 얼굴을 땅에 짓밟고 입을 벌리게 했다. 머리가 짓밟히면서 노란 머리띠가 더러워진 채 눈 앞에 떨어졌다. 거울이 깨졌다. 내 마음속에 있던 거울이 쨍그랑 하고 깨졌다. 누군가 내 입에 벌레들을 쑤셔 넣었다. 벌레가, 두꺼비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하지만 그 눈물도 흙먼지에 더러워졌다. 아무도 눈물에 개의치 않았다.


내 이름은 스즈미야 하루히,

아니, 스즈미야 하루히가 차마 가져가지 못한 기억의 파편이다. 나는 스즈미야 하루히가 버리고 싶었던 모든 것이며, 스즈미야 하루히 마음속에 남은 거울 조각이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꿈을 꾸고 있다. 꿈 속에서 하루히는 유쾌하고 발랄하고, 괴팍하고 기가 드세다. 누구나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고, 아무래도 좋지라는 심정으로 대책없이 낙관적이다. 그 꿈 속에는 나가토 유키가, 아사히나 미쿠루가, 코이즈미 이츠키가 각각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로 등장한다.


당연히 쿈도 나온다. 꿈 속에서는 하루히가 먼저 쿈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작업을 건다. 먼저 우산을 건네주고 쿈을 바라보며 먼저 웃어준다.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가 하루히 몰래 하루히 기분을 맞추어 주려고 계획을 꾸미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가려고 하루히는 나를 버렸다.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몇 번이고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다시 보며 흐느낀다. 내 몸, 아니, 스즈미야 하루히의 실제 몸은 병원에 3년간 누워 있다는 듯하다. 뒷일은 나도 모른다. 조금이나마 바깥에서 있던 일을 들으니 쿈은 애인을 사귀었고 나가토는 대학에 갔으며, 미쿠루는 회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때때로 병실에 찾아온다고 하는데 난 그들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조금이나마 스즈미야 하루히의 몸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온다면, 말이라도 조금 벙긋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날 버리고 남들 앞에 당당히 서고 싶어 했다.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루히가 원하던 방식은 아니지만 행복해한다면, 비록 그 행복이 그저 꿈에 불과하더라도.


스즈미야 하루히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by 비안네 | 2006/06/17 23:39 | 모에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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