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붉은색이 지겹다.

4년이 지나 다시 월드컵 철이 돌아왔다. 마치 돌림병처럼 온 국민이 자칭 붉은 악마가 되어 응원에 나섰다.
온 국민?
그래, 적어도 분위기만은 온 국민이 맞다.
나처럼 축구에 별로 관심하지 않고 승패에도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무니까.

서점에 가도 붉은색, 주유소에 가도 붉은색, 술집에 가도 붉은색을 잔뜩 본다.
붉은색 - 얼마나 강렬하고 투쟁적인 빛깔인가, 얼마나 색정적인 빛깔인가.
 
어디에선가 들은 이야기이다.
뱀은 양기를 잔뜩 머금은 짐승이라 약으로 해 먹으면 효혐이 제대로라고 한다.
하지만 몸에 좋다 하여 뱀을 자꾸 먹어 버릇하면 몸이 독한 약에 길들어서
다른 약을 안 받게 된다고 한다.
 
붉은색처럼 강렬한 빛깔을 가끔씩 써 주어야 더 유용하지 않을까.
 
축구에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축구광이 되어 붉은 옷을 입는다.
국가 대표팀 대 다른 나라 대표팀이 축구 경기를 할 뿐인데 갑자기 '애국심'을 운운한다.
 
대~한민국!
 
하기는, 그런 성향은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하지만 난 결코 그런 상황이 탐탁지 않다.
나는 축구 말고 다른 것을 보고 싶고 다른 것을 하고 싶다.
그저 축구 대표팀끼리 경기할 뿐인데 왜 나라 간 싸움처럼 생각들 하는지.
웃으면서 경기를 보고 이기면 좋아하고 지면 아쉬워한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좋다.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몸을 흔들기-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상한 것이 없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애국심의 불길에 몸을 태우며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것.
골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 나는 그릇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다가 월드텁에서 탈락하기라도 하면 그 순간 월드컵 열기는 바람이 쓸고 간 자리처럼 되겠지.
 
자발적인 응원 열기?
아니, 이 나라에 대한 불만을, 아쉬움을 국가 대표팀 경기에 감정을 이입해서
덜어보려는 욕망이라고 해야겠지.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이 나라는 대단하다고 스스로 위안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나는 이 나라에 애정이 있다. 하지만 애정이 있다고 꼭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내 부모를 꼭 자랑스러워해야 할 필요 따위는 없다.
단지 내 부모이기에 아끼고 애정을 가질 뿐이다. 같은 이치가 아닐까.

이 나라는 아직 문제가 많고 국제 위상도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런 현실을 바로보아야 하지 않을까.
미국을 보아라. 월드컵 순위가 낮아도 누가 미국을 괄시하는가.
국력 앞에서 그런 것 따위 환상에 불과하다.
없던 과거를 꾸밀 필요도 없고,  현실을 외면할 필요도 없다.
지금 이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래의 이 나라는 더 나을 수 있도록 해야 정석이겠지.

나는 18일에 오리엔티어링을 하러 떠난다. 축구 같은 것은 잊자.
 

by 비안네 | 2006/06/14 02:08 | 잡담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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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진냥 at 2006/06/14 14:27
무슨 오리엔티어링이3? 오늘 아침에 학원 가면서 우산을 안 가져와서 비를 쫄딱 맞았습니다. 고육지책으로 은행=ㅅ=에 들어가 비닐을 좀 빌려달라고 말했는데, 직원분이 남는 우산을 내주시더군요. 월드컵 4강한 우리나라보다 이런 평범한 사람이 있는 우리나라 쪽이 저는 훨씬 좋군요. 케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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