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4월 26일
에스페란토와 언어 제국주의
이대로 묻어 버리기 아깝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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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R 톨킨은 중간계(middle earth)에서 온갖 종족이 절대 반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진다는 내용으로 소설 '반지의 제왕'을 썼다. 톨킨은 성품이 꼼꼼한 사람이라 소설을 쓰면서도 해당 종족의 역사·신화를 모두 설정했다. 심지어 엘프들이 쓰는 말을 창작했을 정도이다. 지독할 만큼 꼼꼼한 이 양반은 자기 소설에서 다른 종족들이 만나 이야기하고 회의할 땐 어떻게 한다고 했을까. 톨킨은 중간계 공용어가 있어 어느 나라 어느 종족이든 그 말은 안다고 했다. 그 덕분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들은, 일부러 호빗들이 못 알아듣게 하려고 자기네 종족 말로 하지 않는다면, 어느 자리에 끼어서든 곤욕을 치르지 않았다.
소설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예부터 있었다. 기왕에 공용어로 어느 언어를 골라 쓰려고 한다면, 배우기 쉽고 아름다우며 전하려고 하는 바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말이 적당할까. 옛 동양에서는 한문이 그러한 말로 노릇했고 옛 서양에서는 라틴어가 그런 말로 통했다. 특히나 라틴어는 가톨릭 교회가 공식 언어로 지정하면서 종교적인 신비감까지 깃들였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어, 특히 미국식 영어가 옛날 한문과 라틴어가 있었던 자리를 대신했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 위세가 등등해졌다.
한문이든 라틴어든 모두 그 시절 그 문화권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쓰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식 한자 발음은 중국 당나라 때 발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가톨릭 교회는 훨씬 이전부터 그리스 말을 주로 썼지만, 로마 제국 말인 라틴어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결국 라틴어를 교회 언어로 인정했다. 사실 그리스 말도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 제국을 이루었을 때 각 지방으로 퍼져 오랫동안 공용어 노릇을 해 왔다. 그리스 말이든 라틴어든 장단점이 있다. 격에 따라 어미가 세심하게 굴절하기 때문에 짧은 말 한 마디로도 주어·시제를 나타낼 수 있으며 능동·수동 표현 또한 쉽다. 하지만 격 굴절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장점이면서 단점이다. 격 굴절을 통달하지 못하면 숫제 문장의 주어와 시제조차 짐작할 수 없다. 여기에 단어의 성(性)까지 따지면 더 복잡해진다. (범어는 한술 더 뜬다고 한다.) 라틴어·그리스어는 외국인이 배우기에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도 로마·헬라 제국의 힘·문화력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두 말은 글말 생활과 입말 생활, 양쪽에서 명실공히 공용어로 활약했다. 말 자체가 그 지역 다른 말과 비교해서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 문명권에서 한자가 오랫동안 식자층에서 통용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민족 종교임을 표방하는 종교에서 쓰는 주문은 한자로 되어 있다.
오늘날은 미국이 그러한 제국들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인들은 미국을 로마 제국에 견주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지만, Pax americana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구태여 영어의 본산을 찾자면 마땅히 영국이어야 하지만, 영어를 배울 떄 영국식 영어를 배우는 사람은 숫자가 적다. 사람들 대부분이 미국식 영어를 표준으로 삼아 배운다. 미국식 영어가 영국식 영어랑 비교해서 더 아름답다거나 더 탁월하다거나 할 리 없다. 구태여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 미국인들도 영국식 발음이 살짝 들어 있는 억양을 교양 있다 하여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미국식 영어가 영어 교육의 중심체로 노릇하는 이유는 단지 미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미국 문화가 전세계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외국에 있는 자국 공관에 문화원을 세우거나, 민간 문화원을 지원한다. 자기네 문화를 외국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인데, 주한 미국 대사관은 기왕에 있던 문화원도 철수케 했다. 미국 대사관이 나서서 미국 문화를 홍보하지 않아도, 미국 문화가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전세계 문화와 종교·인종·언어가 집결했다. 영어 안에 외래어가 끊임없이 들어와 영어 사전은 날로 불어만 간다. 과학계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인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면, 미국쪽 학자들 관례를 따르고는 한다. 숱한 과학자들이 미국에서 미국인 학자들 밑에서 공부해서 그렇다.
하지만 말은 단순히 자기 뜻을 전달하는 수단뿐만은 아니다. 각 말은 그 말을 쓰던 사람들이 대대로 이어온 무형 문화재이다. 각 말을 객관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프랑스 학자 '기 소르망'은 그 점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자기네 말이 가장 아름답고 탁월하다" 각 말은 대대로 그 말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형태가 없는 축적물, 인류의 기억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경제력이 우위에 선 사람들이 쓰는 말이 경제력이 못한 사람들이 쓰는 말을 잠식하는 시점이다. 미국 인디언들이 쓰던 말 중에서도 영어에 밀려 대가 끊어진 말이 많이 있다. 조상들이 쓰던 말로 어느 인디언 할머니가 말하기 시작하자, 부족 아이들이 처음 듣는 말이라고 신기해 하며 듣더라는 이야기는 차라리 슬프다. 인류가 간직해 온 소중한 문화 유산이 지금도 경제성 논리 앞에 사라진다.
이런 시점에서 인공 언어 에스페란토는 분명 대안이 될 만하다. 혹자는 인공 언어로 제 뜻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지난 백 년간 에스페란티스토들은 그러한 의혹을 물리칠 만큼 에스페란토를 충분히 써 왔다. 누군가는 인공 언어에는 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말에 정말 혼이 깃들어 있을까? 그 말을 대대로 써온 사람들이 말에 넣어둔 '기억'을 혼이라 부르는 것일까? 정말로 말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면, 타민족의 혼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일은 어째서 용납될까? 오히려 인공 언어에 혼이 없다고 하니, 그것이야말로 다른 민족끼리 이야기할 때, 글을 전할 때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지 않을까? 에스페란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막연히 불안해 해서 에스페란토를 받아들이기 꺼린다. 게다가 에스페란티스토들을 오래 전부터 각 민족 언어를 해치지 않으면서 에스페란토를 써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견지했다. 표준은 있어야 하되, 표준만 있으면 안 된다. 공용어는 있어야 하되, 공용어만 있으면 안 된다. 어느 것이든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한 가지만 남기는 것처럼 위험한 짓이 없다. 여러 가지 길을 다 열어 두어야만 한다. 이러한 원칙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실제로는 힘 있는 나라 말 몇 개가 다른 말을 없애 버리는 현실을 방관만 한다.
인공 언어 에스페란토야말로, 인공 언어이기 때문에 중립적인 공용어로 다른 말과 같이 있을 수 있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만을 위대한 언어로 여기지는 않기 때문에 다른 말을 해치지 않는다. 에스페란토가 공용어로 쓰지 못하는 이유는 에스페란토가 언어로 쓰기이게 단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들 무리가 경제·문화적으로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 by | 2006/04/26 09:53 | 잡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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